성명 : 하륜(河崙) , 1347년(충목왕 3)년 ~ 1416년(태종 16)년
본관 : 진주(晉州)
: 대임(大臨)
: 호정(浩亭)
분묘지 : 진주(晉州) 오방동(梧坊洞) 감산(坎山)
입사경로 : 문과(1365년)
내관직 : 춘추관 검열(春秋館檢閱), 밀직 제학(密直提學), 문하시랑 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영삼 사사(領三司事), 영의정 부사(領議政府使)
외관직 : 지영 주사(知榮州事), 교주강릉도 찰방사(交州江陵道察訪使),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 경기좌도관찰출척사(京畿左道觀察黜陟使)
이인복(李仁復), 이색(李穡)과 좌주-문생의 인연을 맺다

하륜은 어려서부터 의연하여 자질이 남달랐다고 한다. 10살부터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한번 들으면 바로 암기할 정도로 총명하였다. 14세인 1360년(공민왕 9) 국자감시(國子監試)에 합격하였고, 19세인 1365년(공민왕 14) 이인복(李仁復, 1308~1374)과 이색(李穡, 1328~1396)이 주관하는 과거에 합격하면서 이인복·이색과는 과거를 주관한 사람과 합격한 사람이 스승과 사제의 인연을 맺는 좌주-문생의 관계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관계 형성은 그의 학문적·정치적 성장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당대 명문거족 이인복은 그의 국량을 알아보고는 자신의 동생인 이인미(李仁美)의 딸과 혼인을 시켰는데, 당대 거족 가문과의 혼인은 그의 정치적 노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것인지 고려시대 그의 정치적 행로는 순탄한 편에 가까웠다.
순탄한 벼슬길을 가다

하륜은 1367년(공민왕 16) 춘추관 검열(春秋館檢閱)을 시작으로 정계에 입문하였다. 당시 신돈(辛旽)이 중심이 된 개혁정치에는 다소 부정적이었고, 그 결과 파직되기도 하였지만 얼마 후 신돈이 죽자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다. 이후 지영 주사(知榮州事)가 되면서 치적을 쌓아 최고 성적을 받기도 하였으며, 우왕 대까지 사헌 지평(司憲持平)·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밀직 제학(密直提學)을 역임하였다. 특히 명과의 외교관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는데,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거나 사은사(謝恩使)로 중국에 가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고려시대 하륜의 정치적 행보는 대체로 순탄하였으나,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을 반대하면서 양주(襄州)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 유배 사건은 이후 겪게 될 하륜 굴곡 있는 정치적 행로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유배로 일관된 정치 생애를 보내다

1388년(우왕 14)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신진사대부들이 집권세력으로 부상하면서 하륜은 그들에게 배척받는 대상이 되었다. 이 점은 이 시기 그가 대부분의 시간을 유배지에서 보냈다는 사실에서도 잘 알 수 있다. 1388년(창왕 즉위) 이성계 중심의 개혁파에 의해 반대세력 숙청작업이 이루어지면서 하륜 역시 무고죄로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아울러 1389년(공양왕 1)에는 우왕을 복립한다는 죄목으로 울주(蔚州)에, 1390년(공양왕 2) 윤이(尹彛)·이초(李初)의 사건으로 청주(淸州)에 유배되었다가 진주로 돌아왔다.
이듬해에 정몽주의 건의에 의하여 사면령이 내려지고 나서 정몽주와 연대하여 고려 왕조의 존속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성계 세력이 정몽주를 살해하고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하륜의 정치적 입지는 설 자리를 잃어갔다.
조선 태종과의 특별한 인연으로 새 왕조에 출사(出仕)하다

신왕조의 회유와 포섭에 따라 하륜은 1393년(태조 2) 경기좌도 관찰출척사(京畿左道觀察黜陟使)가 되면서 새로운 왕조에서 다시 정치활동을 재개하였다. 특히 신왕조가 계룡산으로 천도하려 하자 힘써 간하여 역사(役事)를 멈추게 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왕자의 난이 발생하자 군사를 동원하여 이방원을 도와주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방원과 인연은 좀 특이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다음의 일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하륜은 여흥부원군 민제(閔霽), 즉 이방원의 장인과 친분 관계가 있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우연히 사석에서 이방원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방원과 헤어진 후 민제에게 말하기를 “내가 사람의 관상은 많이 보았지만 공의 둘째 사위 같은 사람은 없소. 만나고자 하니 뜻을 전해주시오.” 하였다고 하며 이윽고 이방원을 만나 그를 섬기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하륜은 아마도 이 무렵부터 이방원과 인연을 맺었다고 보여 진다.
이후 정종 때 종1품의 문하시랑 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태종 때 종품의 영삼 사사(領三司事) 등을 역임하면서 정계의 핵심적인 위치를 점하였다. 그가 말년에 병을 얻게 되자 그와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던 태종은 그에게 음식물과 약을 주어 위문하였고, 그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울면서 3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았고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게 하였다. 하륜은 이후 태종의 묘정(廟庭)에 봉안되었다.
재상으로서 훌륭한 자질을 지니다

하륜은 천성은 중후하고, 식견이 밝고 도량이 넓었다고 한다. 재상이 되어서는 대체(大體)에 힘쓰고 훌륭한 모책과 비밀 의논을 많이 하였으나 물러나서는 남에게 누설하지 않을 만큼 신중함도 지니고 있었다. 몸가짐을 잘하고, 사람을 대할 때는 한결같이 성심으로 하였으며 친지와 벗 모두에게 신실하여 그를 대한 사람들은 그 은혜를 잊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한 매우 검소하여 사치를 싫어했으며 따라서 연회나 잔치를 즐기지도 않았다.
후대 사람들은 그의 재상으로서의 탁월한 능력에 가치를 부여하여 한나라의 장자방(張子房 : 장량張良), 송나라의 치규(稚圭)라 평가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