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암집 (介庵集) 글자크기
서지
 
해제
   
『개암집』은 조선 중기의 학자 강익(姜翼 ; 1523~1567)의 시문집이다. 강익의 자는 중보(仲輔), 호는 개암(介菴)이다.

이 책은 강익의 손자인 전이 대략 편집해놓았던 것을 1686년(숙종 12) 양천익(梁天翼)에 의하여 편집, 간행되었다. 2권 1책, 목활자본이다.

권두에 정기윤(鄭岐胤)의 서와 권말에 정광연(鄭光淵)·양천익의 발문이 있다. 본서의 권1에는 시 21수, 서(書) 5편,기 2편, 추록으로 시 1수, 국문단가(國文短歌) 3수이며, 권2는 부록으로 세계표(世系表) 1편, 연보 1편, 행장 3편, 묘표 1편, 만장 11편, 제문 2편, 고유문 4편, 소 1편, 묘갈명 1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는 거의가 영남의 유현들과 창화(唱和)한 것으로 20여 수에 불과하며, 5편의 서 또한 조식(曺植)의 문인인 김우옹(金宇?) 등과 경서에 대해 문답한 서신이다. 다만, 국문으로 되어 있는 3편의 단가는 국문시가로는 비교적 초기작품으로 심성(心性)의 수양 등에 관한 유학자의 덕목을 훌륭한 비유와 세련된 기교에 담고 있어 국문학적 의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정온(鄭蘊)이 찬(撰)한 행장에 의하면 강익은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인으로 1549년(명종 4)에 伯兄과 함께 진사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이 없고 오직 독서에 전념하며 모친을 봉양하였다. 두류산 북쪽 등귀동(登龜洞)의 유벽함을 사랑하여 전택을 사서 1552년에 일두(一?) 정여창(鄭汝昌)선생을 위해 서원을 창건하니 곧 남계서원(藍溪書院)이다.

한훤당(寒暄堂)과 일두(一?)가 화를 입은 후로 비록 신원(伸寃)은 되었으나 사기(士氣)가 저하하여 도학을 논하는 자가 드물고 사문(斯文)이 흥취되지 못함을 걱정하여 분연히 여러 사람의 조소를 물리치고 몸과 마음을 바치므로 도학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음은 그의 힘입은 바 크다 할 것이다. 1567년(명종 22)에 천으로 소격서참봉(昭格署參奉)이 되었으나 부임치 못하고 병으로 돌아가니 향년 45세였다. 1660년(현종 1) 남계서원(藍溪書院)에 배향하였다 한다. 남계서원은 소수서원(紹修書院) 다음으로 역사가 오랜 서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