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재선생문집부록 (格齋先生文集附錄) 글자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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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재선생문집』은 손조서(孫肇瑞 ; 生沒年 미상)의 시문집이다. 손조서의 자(字)는 인보(引甫), 호(號)는 격재(格齋)·면재(勉齋), 본관(本貫)은 일직(一直)이다. 태종 말년에 태어나 태종 초에 죽은 것으로 추측된다.

이 책은 1473년(성종 4)경 아들 윤한(胤漢) 등에 의해 초간되었으나, 임진왜란 판본이 소실되었으므로 1644년(인조 22) 다시 그의 후손에 의해 후집으로 간행되었으며, 1771년(영조 47)에 중간되었다.

권 1의 「목부용(木芙蓉)」과 「월야우제(月夜偶題)」·「북간부주(北澗浮舟)」등은 서정과 낭만을 잘 나타낸 영물시(詠物詩)이며, 「천마가(天馬歌)」는 적토마(赤兎馬)를 환상적 상상력으로 찬미한 노래이다. 권 2의 시는 당시와 송시를 차운한 것이다. 규원(閨怨)이나 여심(女心)을 노래한 「반죽(班竹)」·「식부인(息夫人)」·「규정(閨情)」·「동작기(銅雀妓)」 등의 오언시는 당시를 차운한 것이며, 「영국(詠菊)」·「설죽(雪竹)」등의 영물시와 「전가(田家)」·「산촌(山村)」 등은 전원풍경을 노래한 것으로 모두 송시를 차운한 칠언시이다. 그밖에 「궁사(宮詞)」나 「옥문관(玉門關)」과 같이 중국적인 시풍을 그대로 모방한 것도 많다. 대구의 청호서원(靑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격재집』이 있다.

학문과 시문의 대가로 김종직(金宗直)과 친교가 있었으며,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등의 제자를 두었다. 1435년(세종17)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그 해 집현전에 보직되었으며, 봉산군수가 되었다. 1451년(문종 1)에 병조정랑을 지냈다. 1456년(세조 2)에 단종의 복위를 꾀하던 성삼문 등이 살해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은둔, 호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