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암모왕조길례 (敬庵謨王朝吉禮) 글자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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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암모』는 허조(許稠 ; 1369∼1439)의 유집(遺集)이다. 허조(許稠)의 자(字)는 중통(仲通), 호(號)는 경암(敬庵), 본관(本貫)은 하양(河陽)이다.

이 책은 정조 때 그의 후손인 묵(默)이 편집하고 1907년(융희 1) 후손인 용두(容斗) 등이 간행하였다.

허조의 유집은 14, 15세기 정치·사회적 문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전주진남루(全州鎭南樓)」는 진남루에서 풍경을 감상하면서 좋은 시절에 벼슬살이를 하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며 전라감사로 있던 선생의 형 주를 두고 지은 시이다. 『동문선』, 『동국여지승람』 등에도 실려있다. 文은 주로 임금에게 올린 건의문이다. 「청립태학소(請立太學疏)」는 태학을 세워서 인재를 양성할 것을 건의하였고, 「정명분헌의문(正名分獻議文)」에서는 종사에 관계되는 중대한 일이 아니면 웃사람을 능멸하는 풍속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파수륙재계문(罷水陸齋啓文)」은 공신들이 태조와 태종의 기일에 절에 가서 수륙재를 올리는 것을 혁파하도록 계청하였고, 윤허를 얻어 시행되었다.

허조는 권근(權近)의 문인(門人)으로 1383년(우왕 9) 진사, 1385년 생원에 합격하였으며 1390년(공양왕 2) 문과에 급제, 1392년 조선건국후(朝鮮建國後) 좌보궐(左補闕)이 되고 여러 관직을 거쳤다. 『소학』, 『중용』을 즐겨 읽었고, 효행이 지극하였으며, 강직한 성품을 지녔다. 특히, 유교적 윤리관을 보급하여야 하는 조선 초기에 있어서 태종·세종을 도와 예악제도를 정비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1407년 세자를 수행하여 명나라에 들어가 여러 제도를 자세히 조사하였고 돌아오는 도중에 궐리(闕理)에 있는 공자묘에 들렀으며, 그 제도에 따라 조선의 문묘에서 허형(許衡)을 제향하고 양웅(揚雄)을 몰아내었다. 1411년(태종 11)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올라 학당을 세우고 왕실의 의식과 상제(喪制)의 법전화에 노력하였다.

1415년 한성부윤(漢城府尹)에서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을 지냈다. 이듬해 예조참판을 거쳐 1422년 이조판서, 1438년 우의정에 올라 70세로 기영사(耆英社)에 들어가고 청백리로 뽑혔다.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시호(諡號)는 문경(文敬)이며 세종조정(世宗朝廷)에 배향되고 금호서원(琴湖書院)에 봉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