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암집 (敬菴集) 글자크기
서지
 
해제
   
『경암집』은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인 김회(金淮 ; 1578~1641)의 실기이다. 김회의 자는 거원(巨源), 호는 경암(敬菴)이다.

이 책은 1932년 그의 후손인 호우(浩宇)와 호창(浩昌)이 편집, 간행하였고, 석인본이다. 군두에 이중철(李中轍)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9대손 수정(壽禎)과 10대손 휘종(輝鍾)의 발문이 있다.

맨 앞에 세계도(世系圖)·연보(年譜) 각 1편이 있고, 시 36수를 비롯하여 여러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강개하며 임진왜란과 정묘호란·병자호란 등을 겪은 뒤의 광경을 읊은 것이 많다. 시 가운데 「일선회고(一善懷古)」는 전란 뒤에 폐허가 되어버린 선산지방을 지나면서 지난 날의 모습을 생각하며 지은 것이다. 「이천도중(利川途中)」·「사하도중봉우설(沙河途中逢雨雪)」은 길에서 비나 눈을 만나서 괴로워하는 것을 전란을 만나 괴로워하는 백성의 심정에 비유한 것이다.「저요양성유감(抵遼陽城有感)」은 서장관(書狀官)으로서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느낀 감회를 표현한 것이다. 「문강홍립투호개탄유음(聞姜弘立投胡慨嘆有吟)」은 한 나라의 도원수로서 자기의 직분을 지키지 않고, 청나라에 투항한 강홍립(姜弘立)의 행위를 매국적 행위라고 비난하는 내용이다. 「조천일록」도 1618년(광해군 10) 8월에서 이듬해 2월까지 명나라를 다녀오는 동안에 만났던 인물과 다루었던 업무, 중요한 대화의 내용 등을 자세히 기록한 것으로 명나라 서울까지의 노정과 당시 풍물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김종필(金宗泌)이 찬(撰)한 행장에 의하면 김회는 15세 때에 임진왜란을 당하여 부친 후송공(後松公)이 의진(義陳)에 나아감에 함께 배옹(陪擁)해서 진주 촉석루에 올라 「장월등남루 남아보국수(杖口登南樓 男兒報國愁)」한 수 시를 읊어서 강개한 심회를 토로하였다. 그 후 오랜 진중생활에서도 촌극을 아껴서 경학에 잠심하고 수강(修講)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성·경(誠·敬)을 지심(持心)의 근본으로 삼고 효우를 제행(制行)의 근원으로 삼아서 독실히 정진하였다.

1603년(선조 36) 생원시에 합격하고, 1612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정자(成均館正字)가 되었다. 그 후 학유(學諭), 양현고봉사(養賢庫奉事), 의정부사록겸학정(議政府司錄兼學正) 등을 거쳐 1616년 박사겸 직장(博士兼 直長)에 임명되었으나 광해의 혼정(昏政)으로 시폐(時弊)를 예지(豫知)하고 귀향하였다. 1618년 형조좌랑(刑曹佐郞)의 제수에서도 불부하고 동년 8월에는 성절사서장관(聖節使書狀官)의 명을 받고 연경에 갔다가 익년 2월에 복명(復命)하였다. 1623년 인조개옥후(仁祖改玉後) 이조좌랑(吏曹佐郞)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고 1627년 동경교수(東京敎授)에 제수를 받고 난후에 여지없이 퇴폐된 학풍과 기강을 크게 고무 진작시켰다. 1632년 형조정랑(刑曹正郞)에 제수되었으나 환로는 사양하고 유적한 정암서당(鼎巖書堂)에서 자연을 소영(嘯詠)하며 후진강도(後進講道)에 전념하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