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정집 (敬亭集) 글자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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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경정집』은 조선 중기의 문인 이민성(李民宬 ; 1570~1629)의 시문집이다. 이민성의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관보(寬甫), 호는 경정(敬亭)이다. 경상북도 의성출생이다.

이 책은 1664년(현종 5) 양자 정기(廷機)가 간행하였고, 1903년(광무 7) 다시 중간되었다. 목판본이다. 권두에 조경(趙絅)과 정두경(鄭斗卿)의 서문이 있다.

시 1, 257수를 비롯하여 여러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의 시는 당시 매우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었는데, 특히 권6∼8의 「연사창수집(燕?唱酬集)」은 중국에 다녀오는 동안에 지은 시로서, 두보(杜甫)와 한유(韓愈)와 비슷하다 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동해무조석론(東海無潮汐論)」은 우리나라의 동해에 조수가 없다는 설을 부인하고, 동해는 끝없이 넓기 때문에 조수의 폭이 보이지 않을 뿐이지, 결코 조수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 글이다. 「계백론(階伯論)」은 사신(史臣)의 평을 비판하고 계백을 만고의 충신이라 천명하였다. 「조천록」은 그가 중국에 서장관으로 다녀온 기록인데, 당시 우리나라와 청·명과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민성의 아버지는 관찰사 광준(光俊)이며, 어머니는 평산신씨(平山申氏)로 인의(引義) 권(權)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경사(經史)와 제자백가서를 두루 통달하였으며, 효성과 우애가 있어 재덕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1597년(선조 30) 정시문과에 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에 뽑혔으며, 1601년 승정원주서를 거쳐 이듬해 시강원설서에 제수되고 사서로 승진, 서장관(書狀官)으로 차출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3년 예조좌랑을 거쳐 병조좌랑에 전임되고, 곧 정랑으로 승진되었다. 1605년 이조정랑에 천거되었으나 정인홍(鄭仁弘) 일당의 반대로 제주점마어사(濟州點馬御史)가 되었다. 그 뒤 얼마간 일을 보다가 시사(時事)의 동향이 심상하지 않아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1608년 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으며, 문학(文學)으로 옮겨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그 이듬해 옥당(玉堂)에 선입(選入)되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귀향, 여묘(廬墓) 3년을 마치고 홍문관수찬에 다시 임명되었으며, 그 뒤 교리·세자시강원겸문학 등을 역임하였다. 1617년(광해군 9) 정조(鄭造)·윤인(尹?)에 득죄(得罪)함이 심하다는 내용의 차자(箚子)를 올렸다가 이이첨(李爾瞻) 등의 모함을 받아 삭직되어 그 뒤 고향에 내려가서 거의 10년 동안 글씨와 그림으로 소일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때 사헌부장령에 복직하였다.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그 공로로 성균관사성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가자(加資)를 받고, 아울러 전답과 노비를 하사받았다.

그 뒤 동부승지를 거쳐 좌승지에 승진되었다. 1627년(인조5) 정묘호란 때 영남호소사(嶺南號召使) 장현광(張顯光)의 추천으로 경상좌도 의병대장이 되어 전주에까지 진출, 왕세자를 보호하였다. 1629년 형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직, 그 해에 죽었다. 직언을 잘하기로 이름 높았으며, 의리에 강하여 광해군의 난정 때 간당(奸黨)들에게 모함을 받은 이덕형(李德馨)·이원익(李元翼)과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출하려고 힘썼다.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명나라에 갔을 때 그곳의 학사·대부들과 수창(酬唱)한 시는 사람들에게 애송되어 중국사람들이 그를 이적선(李謫仙:이태백을 이름)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까지 전하는 시는 1,000여수에 이른다. 경상북도 의성의 장대서원(藏待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경정집』13권, 보유(補遺) 합 4책과 『조천록(朝天錄)』 등이 전한다. 신열도(申悅道)가 찬(撰)한 행장에 의하면 그는 1597년(선조 30) 정시문과(庭試文科)에 합격하여 승문원저작(承文院著作)이 되고 1601년 승문원주서(承文院注書), 이듬해 시강원설서(侍講院說書), 사서(司書)를 거쳐 서장관(書狀官)으로 명에 갔다. 1603년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어 문신월과(文臣月課)에 장원하였고 1605년 제주점마사(濟州點馬使)가 되었다. 이후부터 수 년동안 향제(鄕第)에 퇴거하였다가 1608년 다시 지평(持平)에 오르고 1613년(광해군 5) 예조정랑(禮曹正郞)에서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가 되어 폐모론을 반대하고 이어서 이성(李惺) 등이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을 무고(誣告)한 것을 논핵하다가 파직되었다. 1615년 수찬(修撰)이 되어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을 신구(伸救)하다가 또 다시 삭직되어 하향하였다. 인조반정 후 종부시정(宗簿寺正)으로 환조(還朝)하여 주청사서장관(奏請使書狀官)으로 명에 들어가서 사명을 마치고 통정대부에 올라 형조참의(刑曹參議), 동부승지(同副承旨), 좌승지(左承旨)를 역임하고 북방의 변비(邊備)가 허술함을 우려하여 국방을 튼튼히 할 것을 주청하였으나 청허(聽許)되지 못했다. 1627년 정묘호란을 당하여 대가(大駕)를 모시고 강화에 피난하였다가 난정(亂定) 후에 환도하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