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암실기 (休巖實紀) 글자크기
서지
 
해제
   
『휴암실기』는 공서린(孔瑞麟 ; 1483∼1541)의 실기이다. 공서린의 자는 희성(希聖), 호는 휴암(休巖), 본관은 창원(昌原)이다.

이 책은 12대손 재환(在煥)이 편집하여 1937년 공석우(孔錫祐)가 간행하였다. 이 중 주목되는 것은 두 편의 소(疏)이다. 권2의「논삼공재기장단소(論三公才器長短疏)」는 사간원사간으로 있을 때 올린 글로, 삼정승이 갖추어야 할 재질과 기량을 진술하고, 인물의 평론과 조정의 국정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당시 유생들의 불만을 함께 기록하고 있다. 또, 조정 중신들의 국정의 득실을 논하였고, 조광조를 비롯한 당시 신진사류와 심정(沈貞)·남곤(南袞) 등 훈구세력간의 갈등, 그리고 그 갈등이 빚어낸 기묘사화의 배경과 전말을 각 문헌에서 뽑아 부기해 놓고 있어, 이 시기 정치사 연구의 자료가 된다. 「인뇌진구언상소(因雷震求言上疏)」는 북쪽의 오랑캐가 침입할 조짐이 있는데도 방비가 소홀하고, 변방의 장수들은 탐학하며, 사류들은 풍속이 바르지 못하여 국가가 위태로움에 빠져 있음을 지적하는 한편, 그 대책을 촉구한 글이다. 그가 조야에서 활약한 사적이 함께 들어 있다.

공서린은 김굉필(金宏弼)에게서 배우고 조광조(趙光祖)와 교우했다. 1507년(중종 2)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519년 승지(承旨)가 되고 기묘사화 때 조광조와 함께 투옥되었다가 곧 석방되었다. 그 후 어지러운 조정의 행정에 분격하여 재상을 공격하고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선비들의 무죄를 상소, 누차 관직을 삭탈당했다. 정권을 장악하여 횡포를 부리던 김안로(金安老)가 죽은 후, 1538년(중종 33)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고 이듬해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가 되었다.